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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기관:총학생회

총학생회

총학생회는 학생들을 위한 자치기구다. 학과를 구성하는 학생들이 과학생회를 만들고, 과학생회가 단과대 학생회를 만들고, 단과대 학생회가 총학생회의 기반을 이루게 된다.

총학생회는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80년대 군부 독재 시절에는 학생회가 없었고 어용학생 단체인 학도호국단이라는 단체 가 있었다. 이것을 바꾸어 선배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투쟁으로 학생자치 기구인 총학생회를 만들어 낸 것이다. 당시에는 징계와 구속을 각오하고 총학생회를 건설해 낸 것이다. 실제로 학교에 의해 징계로 제적되고 군사정권에 의해 탄압받아 구속된 선배들도 있었다.

총학생회의 건설은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라는 위상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진짜 주인인 학생이 가짜 주인을 몰아 내는 일이 앞장 섰다. 정부비판에 대한 대자보 한장 마음대로 붙이지 못하는 학교의 통제로 부터 자유로와 져 진리와 정의의 상아탑을 학생스스로 만든다는 비전이 있었다. 1980년대와 90년대 초까지는 총학생회는 생활 학문 투쟁의 공동체라는 기치를 내걸고 과거 학생운동의 리더역할을 한다. 사회민주화의 동력을 제공하는 혁명의 전초기지로서 대학을 사고하는 경향이 있었다.

2013년에야 학생들의 이슈를 정치권이 받아 반값등록금 문제가 학생들이 안나서도 되었지만 과거에는 학교가 등록금을 인상하려고 하면 학생들이 나서서 등록금 인하 투쟁을 많이 벌였다. 교육환경을 개선하라는 요구도 많이 하였다. 1980년대 학생운동이 활발할 무렵에는 총학생회를 통해 대중적 학생운동을 했다.

세종대학교 역대 총학생회

년도 명칭 회장 부회장 비고
1984 0 박상렬 (준비위)
1985 1 이종수
1986 2 은상기 김형식
1987 3 황동렬 이봉희
1988 4 성수희 이강돈
1989 5 한명수 이구명
1990 6 새시대 홍성수 정유진
1991 7 김태일 이정은
1992 8 권오성 한상현
1993 9 윤창현 박정배
1994 10 박승두 송선우
1995 11 김유철 이희윤
1996 12 현용철 박경주
1997 13 정종민 박경용 사퇴
1997 14 자유지성 강대진 이영애
1998 15 손상용 손용구
1999 16 유니버스 서원배 조현철
2000 17 한다면 한다 박기태 구동진
2001 18 솔리다리떼 신용문 김창선
2002 19 든든하다 정진호 김형석
2003 20 유쾌한 반란 황상석 임경훈
2004 21 세잎크로버 정재경 전옥미
2005 22 알음알이 조덕현 김현오 김현오 사퇴
2006 23 우리 장현동 박문수
2007 24 한걸음 박일순 변지은
2008 25 공감 진재연 박나래
2009 26 어깨동무 이시행 이거섭 재선거 당선
2010 선거 무산
2011 27 새로고침 유제승 김유현
2012 선거 무산
2013 28 O2 박기준 김슬기
2014 29 액 션 김종현 강희령
2015 30 티 온 두만강 조윤주
2016 31 지 음 윤성현 박가인
2017 32 LEGO 최우빈 지희원
2018 - 비상대책위원회 박병욱 김희주
2018 33 체 크 박세경 노유빈 재선거 당선
2019 34 띵 동 김지운 최규담
2020 35 타 겟 문대훈 임수현

총학생회 건설과 40년 학생운동의 역사 그리고

1. 세종대 학생회의 역사적 대장정

01.

현재가 척박하다고 해서 과거를 탓할 수 많은 없다. 왜냐하면 과거엔 엄청난 노력과 희생을 치루었던 선배들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뜨거워 세상을 집어 삼킬 듯한 거대한 변화의 열망은 청춘의 아스팔트도 녹였다. 대학의 비리를 폭로하고, 재단의 실체를 파악하여, 과거의 억압과 통제를 벗겨 냈기 때문이다. 이제 미래가 안보인다고 현재를 원망만 해도 소용없다.

역사는 과거에서 현재로만 흐르고, 현재가 만든 현실이 미래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종대의 학생들의 행복한 미래는 현재의 학생들이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아무런 조건없이 거저 얻어지는 자유란 없다. 대학의 자유와 행복이란 피어린 땀과 노력의 댓가라는 것이 역사의 숙명이다.

02.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자랑스러운 대학으로, 후회없는 학생회 활동으로 행복한 대학생활을 만드는데 혼신의 노력을 경주해 왔으나 미완성의 대학혁명이었다. 그러나 세종대 학생회의 역사적 대장정은 때로는 대의 학생들은 대학과 정권의 탄압을 잔혹스럽게 받으며 제적과 구속을 두려워 하지 않았고, 함께 하는 열정과 거침없는 도전으로 승리의 환호와 시대적 이슈를 주도하며 왔다. 두렵기도 했지만 자랑스러웠던 시절이 훨씬 더 많았다.

한사람이 꿈꾸는 대학이 아닌 모두가 꿈꾸며 실천했던 학생이 자유로운 자유대학, 학생들에 대한 억압과 통제가 사라진 해방대학, 학생이 주인인 자치대학, 학생이 행복한 행복대학의 대장정이 세종대 학생회의 역사다. 학교와 정권에 맞짱 뜨며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약한자를 위해 연대하며, 대학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했다. 지성인의 비판지성과 행동하는 양심의 상징이 되려 청춘을 불태웠다. 분노에 찬 지성으로 시대를 뒤집고 전국대학교의 모범이자 자랑이었다. 학원민주화투쟁, 학원자주화투쟁(학자투), 학원자치투쟁, 대학교육투쟁으로 불리며 학생이 대학의 주인이 되는 역사적 대장정을 걸어왔다.

03.

세종대 학생회의 대장정은 때로는 탄압과 시대의 혹독한 폭풍우에 좌절하고 오랜 시간 반성과 침묵의 단련을 겪으며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나갔던 피끊은 청춘들의 대정정이었다. 정권의 핵심부 에 재단과 학교의 비리 사학의 본질을 해결위대 나섰던 폭발적 에너지와 두려움 없이 멈추지 않는 심장을 세종대 학생들은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싶었다. 때론 좌절하고, 침묵하기도 했지만 끝없이 앞을 향해 갔던 피끓는 청춘들의 대장정의 역사다. 학생이 자유롭고 행복한 주인이 대학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학생회 선배들의 치열한 역사와의 대장정을 떠나보자. 1978년에서 2018년의 40년의 학생회와 학생 운동을 지켜온 자랑스러운 역사기록을 찾아 오늘의 교훈으로 삼아보자.

2. 여자선배들, 1973년 유인물, 1978년 집단투쟁의 기록

01.

1960년과 70년대 수도여자사범대학교의 학생회와 학생운동의 역사는 기록이 거의 없다. 1960년 4. 19 혁명, 그리고 1969년의 3선 개헌 반대 투쟁 등이 학생운동 전체에서 있어 왔으나 수도여자사범대학에서는 궐기했다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학생자치 활동과 의식있던 지성인들의활동은 물밑으로 지속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1973. 11. 15. 수도여자사범대학은 정확치 않지만 학생 또는 교수들의 명의로 양심에 호소한 6개의 결의문을 채택한다. 1. 정부는 국민의 기본권과 생존권을 최대한 보장으로 진정한 민주체제를 확립하라. 2. 정부는 인권, 출판, 집회, 결사의자유를 적극보장하여 안전한 지성인의 본본을 오한다. 3. 학원내의 정보와 경찰권을 물러나고 학원의 자유의 교권을 보장하라. 4. 구속학생을 석방하라. 5. 정부는 학원사회에 대한 일련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라. 6. 국공립대의 대우를 동등히하라.

0.2

이 시기는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가 긴급조치며 총칼로 탄압을 일삼던 시기였다. 이때 대양학원 재단은 박정희정권과 유착한 기록이 보이는데 그것은 박물관 개관식에 박정희 정권이 친히 방문하여 테이프 커팅식을 한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전국대학 최초로 박정희정권의 특혜를 받아 명동의 수도여자사범대 건물이 있던 교지에 수익사업인 세종호텔을 재단사업으로 건축하여 시작한다. 이것으로 보아 대양학원재단은 박정희 정권의 대단한 비호아래 세종대학을 운영을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생회 또는 학생운동의 공식적인 기록은 1978년 9월말 대양학원과 학교본부가 일방적으로 수도여자사범대학을 세종대학으로 이름을 바꾸어 남녀공학으로 바꾼다는 발표가 있은 직 후 자연발생적으로 집단적 투쟁과 시위부터다. 이 투쟁의 발단은 미국에서 유학 후 귀국한 재단이사장의 큰 아들인 주00건의 교수자리를 만들어 주기 위해 사범대학을 포기한 일이었다.

03.

남녀공학인 세종대학으로 이름을 바꾸고 수도사범대학에서는 없었던 경상계열을 신설하고 경제학과를 만들었다. 사범대학에서 일반대학으로 바꾸려는 음모 아래 학생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수도여자사범대학의 역사를 종식시킨 것이다. 수도여자대학 선배들은 학생들을 무시하고 학생들의 미래가 달린 일을 학생들의 의견수렴 절차 없이 강행한 것이다.

이사장 아들 한 사람의 직장을 만들어 주기 위하여 사범대학을 포기하고 세종대학을 만들일이라 생각하고 학생들은 분노했으며 이것은 대양학원의 족벌비리재단의 구축음모에 저항한 분노의 투쟁이었다. 이 투쟁은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투쟁이었는데, 그 이유는 세종대의 미래를 10년 이상 내다보며 싸웠던 자연발생적이지만 역사적 투쟁이었다.

그러나 1978년 투쟁은 단 한번의 시위투쟁으로 한달동안 휴교를 당하여 당시 시대상에 여자선배들이 조직적이고 지속적으로 싸울수 있는데 한계로 남고 만다. 그렇지만 학생자치와 학생들의 의지를 표출했다는 측면에서 1980년 들불처럼 일어났던 학생자치 활동의 씨앗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04.

한편 이사장의 아들은 학내에서 기획실장과 대학원원장 등 주요보직을 맡으며 대학을 비리와 부정의 온상으로 만들어 1978년 후 정확히 10년이 되는 1987년 학생들의 집단 투쟁으로 거대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이 유명한 1987년 세종대학교 장기투쟁의 원조였던 학원민주화 100일의 수업거부 투쟁이 일어 나게 된다. 학생들의 대중적 싸움은 이렇듯 과거와 현재의 데자뷰가 10년 혹은 15년 주기로 일어나는 것이 세종대 학생회 운동의 보기드문 역사였다.

지금으로 하면 이화여대의 여학생들이 자연발생적으로 대학본부의 일방적 학사개편으로 만들려고 했던 미래라이프대학의 반대 투쟁과 유사하다고 보면 이해가 쉽다.

3. 1979년 빛독서회 3인의 선도투쟁, 유인물 제적

01.

1978년 수도여자사범대학 선배들의 투쟁은 현상적으로 탄압을 받아 패배로 끝나는 듯 보였지만 이는 학생들의 자각을 통해 1979년 남녀공학의 세종대학으로 개편되는 것을 계기로 하여 새로운 상황에서 더욱 모험적이고 더욱 집단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1978년 남녀공학 반대투쟁이 하루 투쟁과 한달의 휴교령으로 탄압받고 침체된 가운데 1979년 남자학번들이 세종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이때 선배였던 여자선배가 1학년 학생들과 변화를 위한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된다. 학교의 독선적인 운영방식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학생들은 학생들의 의사표시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침체되어 가는 학내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유인물 배포를 구상했다.

남인순(국문 3)은 이혁(경상계열 1)과 신내범(경상계열 1)과 함께 토론도 하며 학내의 상황을 고려한 유인물을 배포하였는데 유인물은 <세종인의 자율화를 위한 서장>이란 제목아래 학교의 근본적인 체제와 문제를 비판했다.

02.

학생시위에 대한 구체적인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들은 1차적으로 유인물을 기말시험 기간 중에 시험이 있는 강의실에 학생들이 오기전에 각각 배포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6. 23일 아침에 유인물을 각 강의실에 배포하고 모짜르트 홀로 들어가는 계단에 이혁이 유인물을 놓다가 학교에 있는 청소부에게 걸리게 되어 유인물은 학교에 의하여 모두 수거되거 3인의 거사는 수포가 되었다. 일명, 3인의 유인물 사건이다.

이로 인하여 구속은 안되었으나 이들 셋은 제적을 당하게 되었다. 1학년이 유인물 한장 돌리기 위해 그 얼마나 힘들고 가슴 졸이며 숨막혔던 밤을 보냈던가. 신입생인 선배들의 심장박동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지금 생각하면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지만 당시에는 유인물 한장 돌리는 출판사상의 자유를 위해서는 제적도 감수해야 하는 시기였다. 대자보 한방 붙이고 유인물 한장 돌리는 데는 엄청난 용기와 희생이 필요했다. 그것을 통해 오늘날 학생회가 캠퍼스의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게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대자보 한장 붙이려면 학생과의 도장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아이러니 하게도 학생회의 자치활동의 퇴보를 안타깝게 느실수 밖에 없다.

당시에는 유인물 한장만 돌려도 폭압적 탄압인 제적이 되었던 시기고 이러한 암울한 시대에도 세종대 학생회와 학생운동을 위한 치열한 고민과 노력은 40년 전 선배들에게 뜨거운 심장으로 살아 있었다. 이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기록으로 남아 있는 자료다.

03.

1979년 발생했던 3인의 유인물 제적투쟁으로 공개조직에서 비공객조직으로 깊숙히 이념과 조직적 정비를 준비하여 1980년대 4월 농성투쟁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독립운동이 그렇듯 선도 투쟁은 대중에게 깊은 각인과 성찰을 가져와 조직보위를 지키며 대중적인 투쟁의 준비기에 접어 들게 된다.

3인의 거사를 이끌었던 여자선배인 남인순은 훗날 재입학하여 세종대를 졸업하고 여성운동을 하다가 지금은 19대와 20대 국회의원이 되어 정치활동을 벌이며 세종대 동문들의 명예를 빛내고 있는 인물이다.

4. 1980년, 세종대엔 이런 교수님이 있었다.

01.

선배들에게 말로만 듣던 전설같은 교수님이 계셨다. 1980년 1학기 교양과목을 담당 했던 주채혁이라는 젊은 교수님이 계셨다. 그는 교양필수과목인 ‘문화사’를 강의 했다. 교수님은 첫 시간에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의 전공은 ‘중국사회경제사’인데 학교에서 ‘문화사’를 맡으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맡기는 했지만 강의는 ‘중국사회경제사’를 하겠으니 수강하기 싫은 학생들은 다른 과목으로 변경하라고 했다.

이제까지 어떤 교수들을 통해서도 들을 수 없었던 단도직입적인 그의 표현이 마음에 끌려 강의를 듣게 되었다. 그의 강의가 역사발전의 합법칙성에 관한 주제에서부터 시작해서 일본의 제학파간의 논쟁을 다룬 뒤 막 본격적인 ‘중국사회경제사’로 들어갈 즈음 4월 3일의 투쟁은 일어났고 그 후 총학생회 구성의 일정에 들어갔을 때 강의는 다시 시작되었다.

02.

그의 강의는 더 이상 ‘중국사회경제사’는 아니었다. 그의 강의는 성명서를 낭독으로 시작되어 싸움의 진행상황 그리고 학생들이 가져야할 자세를 설명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농성에 참여하지 않는 학생들은 내 강의를 들을 자격이 없다!” 그뒤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중간고사를 보게 되었다. 강의실에 들어와 답안지를 나누어주고는 칠판에 다음과 같은 문제를 출제했다.

“세종대 학생운동의 역사적 의의에 관하여 논술하라.”

03.

주채혁 교수님은 전두환의 구태타가 등장한 1980. 5.17 이후 해직되어 우리대학을 떠나야만 했다. 오랫동안 우리는 심장이 뛰는 교수님의 강의와 현실과 역사를 아우르는 펄펄한 강의를 전설속으로만 들어야 했다. 이 당시 재단은 신군부인 전두환 장군에게로 유명한 편지를 써서 아부와 로비를 통해 세종대에 휴교령을 내리게 하고 세종대의 열혈 민주청년들을 잡아가게 된다. 이사실은 1987년 학생들이 100일 농성투쟁을 하는 가운데 전두환 장군에게 보내는 편지자료를 찾아내어 확인케 된다.

세종대 학생운동이 번번히 좌절되고, 경험을 공유하고 역사를 전달한 기록과 자료가 부족한 탓이기도 하다. 역사적 투쟁을 후세대에 경험과 교훈을 전달할 수 있는 자료가 필요했다. '아, 그 전설같은 투쟁…'이라던 구두로 전승된 신화에서 기록된 문화가 필요했다.

학생운동의 역사기술은 사실 위 시험에 대한 답으로 써내려간 이야기다. 세종대 학생운동의 역사는 1973년 유인물에서 시작하여, 1978년, 1979년, 1980년을 이어서 민주대학의 대장정을 피와 눈물로 써내려 갔다. 민주시대의 답을 찾는 역사적 도전의 기록이다.

04.

1980년을 기록한 것은 79학번 임영인 선배다. 입학 후 35년을 넘어서도 미완의 대학민주주의를 위해 대학평의회의 동문대표로 참여하고 개혁과 발전을 위한 동문모임의 대표로, 총선후보선출위원회 동문대표로 재학시절 못지 않게 종횡무진 역할을 다하였다. 그는 현재 성공회 신부님으로 봉직하고 있다. 80년대를 기록한 자료가 그나마 많아서 좀 길더라도 가급적 전문을 게재하려 한다. 당시 제목은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 E.H. 카아의 책에 나오는 역사란 무엇인가?의 대답이기도 하다.

이글을 통해서 80년 4월의 투쟁을 이해하고 오늘의 우리대학이 안고 있는 모순의 해결을 위해 70년대 세대와 80년대세대 그리고 90년대 세대간에 현재와 과거를 뛰어넘는 대화가 이루어지길 바란다. 더불어 선후배간의 연대의식이 가 튼튼하게 다져지기를 기대한다. 이러한 공동체는 이제까지의 정체를 극복하고 진정한 대학발전을 위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또한 이글이 간단없이 계속되어온 우리대학의 학생운동사를 정리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각 세대마다 경험한 것을 정리하여 하나로 묶는다면 훌륭한 역사책이 될 것이다.

5. 1980년, 총학생회의 추진 바람이 일다

01.

1979년 3인이 유인물 사건으로 제적되며 이념서클인 활동가 그룹은 언더(지하)로 더욱 깊이 숨어서 1980년을 준비 했다. 1980년은 사회 각 분야에서 민주화를 실현시키는 움직임이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새봄 새학기를 맞이하는 캠퍼스는 이제까지 볼수 없던 새로운 봄바람이 불어왔다. 학원 자율화 운동이 시작되었다. 학원자유화는 학원민주화, 학원자주화, 대학자치활동으로 그 개념이 조금씩 변화가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학생회이 자치활동이 기본이었다. 교수들은 교수협의회를 궝하고 교수재임용제 폐지 교수회의 기능확대 등을 주장하며 '부당한 제도의 악용에 의한 교권침해를 저지하겠다'는 결의를 발표하기도 했다.

1980년 연세대 등 타 대학들은 총학생회를 구성했고 학생들은 학생자치와 학내언론의 자유, 서클활동의 자유를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제적생도 복교를 준비하여 학생회를 부활시키고자하는 재학생들과 함께 했다. 세종대에서도 제적생 6명의 복교조치가 있었다. 복교조치가 취해진 6명은 과학교육과 배경순, 호텔경영학과 오혜자, 경상계열 이혁, 신내범, 국어국문과 남인순, 영어영문과 최정식이었다. 그러나 군입대와 개인의 사정등으로 복교하지 못하고 5. 17 이후 다시 제적되었다.

02.

타 대학의 학원자율화의 움직임이 세종대에서도 나타나는데 2월부터 몇개의 활동적인 서클(동아리)를 중심으로 학칙과 학생회칙의 민주적인 개정, 그리고 학도호국단의 폐지와 학생회의 부활이었다. 학생들의 이런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활동에 대해 대학본부는 '불순 분자'라고 매도하며 징계 등으로 협박하고 과대표와 서클회장이 모이는 날짜와 시간에 지도교수가 개별적으로 불러 면담을 하는 등 통제와 방해를 일삼았다.

1980년 2월부터 7개서클 전임회장들은 서클화성화에 대해 논의하며 대학본부의 부당한 간섭과 규제를 규탄했다. 빛독서회, 죽순회, KUSA, 군자문학회, USSA 등이 주축이 되어 사회민주화의 분위기에 발 맞추어 학원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학생회의 부활이 중요하다고 보고 학칙과 학생회칙이 개정이 필요했다. 당시는 학도호국단이 학생자치 조직으로 구성되어 학원민주화를 위해 나설 의사가 전혀 없었다.

03.

서클회장단이 모여 서클연합회를 구성했고 과학생회장들이 참석하여 '학원민주화를 위한 전체회의'를 개최하고 학원자율화 추진위원회(10인추)를 구성했다. 10인추는 서클대표 3인, 학과대표 3인, 2부대표 2인, 남학생대표 2인으로 구성되었다. 10인추는 학생공청회를 학교에 제안했는데 학교측은 학생회 부활추진 움직임에 놀랐는지 공청회도 불허하고 10인추도 불인정했다. 10인추는 학교의 승인을 받지 못하자 자진해산 했다.

학교측은 서클대표들을 배제하고 '통제하기 쉬운 학생장체제'를 구상하여 학칙개정시안을 발표했다. 학도호국단의 군대식 명칭을 폐지하고, 과대표와 학생회의 임원자격을 4.0만점 중 3.0 이상으로 제한하며, 학생장은 과대표에 이한 간접선거로 선출하고 학교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이다. 명칭만 학생회로 바뀐 것이고 학도호국단 체제와 하등 다를바가 없는 기만적 학칙개정안이었다.

1980년 당시의 학생준칙에는 다음과 같은 반민주적인 조항들이 있었다. 학생단체 또는 학생이 교내의 10인 이상의 집회를 열고자 할 때에는 집회의 목적, 개최일시, 장소 및 참가예정인원에 대하여 학생처장과 학장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학생단체 또는 학생이 다음에 열거한 행위를 할 때에는 학장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교내 광고, 인쇄물의 첨부 또는 배부, 외부인사의 학내초청. 학생단체 또는 학생이 교외에서 인쇄무 혹은 물품을 배부 회람 판매 할 경우, 또는 서명운동, 모금, 여론조사 등을 행하고자 할때에는 학장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04.

이외에도 불손한 행동을 한자, 복장이 불량한 자, 금지된 물품을 소지한 자, 허가를 얻지 않고 광고 인쇄물 등을 붙이거나 배포한자, 각종 행사에 정당한 사유없이 불참 한자 드은 3일 이상 7일 이하의 근신에 처하며, 허위사항을 날조유포한자, 학내의 풍기를 문란하게 하는 행동을 한자, 학생으로서 출입해서는 안되는 장소에 출입한 자는 7일이상 30일 이내의 유기정학 또는 무기정학에 처하며 학원 내에서 정치활동을 하거나 할 목적으로 단체를 조직하거나 선동을 한자, 허가없이 단체를 조직하거나 집회를 한자, 교내에서 불온 인쇄물을 붙이거나 살포한자는 제명처분 한다고 되어 있다.

초등학생도 아니고 대학생들에게 이러한 출판집회사상의 자율를 가로막과 제한하는 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되물어야 한다. 선배들은 이러한 자유를 얻기 위하여 징계와 구속을 각오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야 했다. 지금 후배들이 누리고 있는 자유는 먼저 행동한 선배들의 치열한 역사가 숨쉬는 것이다. 이런한 것조차 지키지 못하고 단절과 망각의 늪에서 허우적 거린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학교측의 점점더 집요하고 교묘하고 지능적인 관리와 통제에서 학생회는 벗어나야 한다. 깨어있어야 한다. 역사적 사실을 통해 교훈을 얻고 오늘의 지혜와 학생회의 자긍심을 갖길 기대한다. 세종대에 대해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들이 너무 많다.

05.

간접선거, 학점제한문제 등 학교측의 비민주적인 발상에 대한 항의표시로 일부학과에서는 과대표 선출을 거부했다. 1,2학년의 경우 학교측이 제시한 4.0만점에 3.0 이상인 학생이 한 과에 불과 1 - 3명 밖에 안되었다. 공청회를 준비하던 학생들과 새로 뽑힌 과대표 12명, 서클회장 4명은 군자관 304호 강의실에서 회합을 가졌다. 이들은 학교측이 학원민주화를 저해하는 행동을 계속 자행하므로 조속한 시일내에 '학칙과 학생회칙 개정에 관한 공청회'를 열기로 합의하고 참석못한 과대표와 서클회장에서 동의서명을 받기로 하고 전교생에 대한 홍보작업을 진행했다.

6. 1980년, 총학생회의 효시 24추 투쟁기

01.

1980년 3월 27일 오후 3시 새날관 3층에서 열린 '전체 과대표 월례회의'에서 학교측은 마지못해 학생회 부활을 공식승인했다. 그러나 서클대표들을 배제하고 통제를 쉽게 하기 위해 월례회의를 주도했다. 아직 전체 과대표들이 선출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학생회 부활추진위원회'를 계열별로 4명씩 24명으로 구성할 것을 제안하였다. 학교의 통제에 반발한 일부 학생들은 학교측의 제지함에도 불구하고 학원자율화에 대한 성명서를 채택하고 민주적인 학생회를 부활시킬 것을 결의했다.

학교측은 기만적이고 교활한 수법으로 세종호텔에서 부페를 시켜 놓고 새로 뽑힌 과대표드에게 디스코 파티를 제공하기도 했다. 학생들에게 술과 음식으로 향응을 제공한 것이다. 성명서를 채택한 학생들은 과감히 파티를 거부하고 나왔다. 3월 29일(토) 오전 10시에 학생회 부활추진위원회 1차 모임이 열렸다. 경상계열과 인문계열이 일부학고에서는 여전히 과대표 서출을 거부하고 있었다.

02.

학생회 부활추진위원회의 1차 모임에 참석한 학생들은 “세종대학 총학생회 부활추진위원회”(약칭 24추)를 새로 구성하고 위원장(박춘노 경제2)를 새로 선출했다. 이것이 총학생회의 전신이자 효시가 된 학생자치 모임이다. 이들은 학생회 구성을 효율적으로 추지하기 위하여 24명의 추진위원을 연구부, 홍보부, 진행부 등의 부서별로 조직화를 했다. 또한 학생회 부활시까지 학생을 대표하는 모든 업무를 학도호국단으로 부터 이임 받았다.

24추는 '학칙과 학생회칙을 개정하여 민주적인 학생회를 부활시키는 것을 학생회 부활 추진위원회의 임무'로 설정하고 공청회를 열것을 결의헀다. 아울러 24추의 결성을 알리는 서영서를 작성 발표하고 명단을 공개하기로 했다. 이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유경희 국문3, 장재숙 일어3 이장의 영문2, 장용호 어문1, 이선히 지리4, 윤명애 역사3, 김성일 교육2, 김용수 사회1, 우화선 관경3, 박춘노 경제2, 장덕성 관경2, 김동오 무역2, 김정미 식영3, 김옥수 화학3, 강재훈 화학2, 이병우 이공1, 박은하 무용3, 구완서 음악3, 진기영 회화2, 배정철 체육1, 김수일 경영2, 신석균 회계2, 고원섭 무역2, 김기식 일어1

03.

3월 31일 24추는 성명서를 학생들에게 배포했다. “우리 세종대학 학생회 부활추진위원 24명은 구제도하의 산물인 학도호국단을 철폐하고 학생의 민주적인 자치활동을 보장하기 위하여 학생회르 부활시키고자 한다. 본 추진위원은 학생들의 의견을 민주적인 방법으로 집약하여 조속한 시일내에 학생회를 부활시키고 학생회 구성과 동시에 해체된다. 또한 이일의 추진과정에 있어서 어떠한 외세의 간섭에 대한 자치와 자율의 침해를 단호히 거부할 것을 천명하는 바이다.”

24추는 공청회 개최일자를 4월 3일로 잡고 학칙과 학생회칙의 시안 마련 작업을 서둘렀다. 이미 타 대학은 3월 중순까지 총학생회 선거를 마친상태 였다. 이들은 우리대학의 자율화(민주화) 실현 여부는 본질적으로 족벌철폐에 달려있다고보고 족벌철폐를 위한 투쟁을 준비하며 전설이라 불리우는 1980년 철야농성 싸움을 대중적으로 이끌게 된다.

04.

총학생회의 기원을 1984년으로 보는데 그건 잘 못된 사실이다. 1980년에 이미 총학생회 건설의 효시가 되었던 24인 추진위원회가 있었다. 대중적인 투쟁과 학생들의 권익을 대표하는 활동을 전개한 24추는 가히 총학생회 건설의 효시이자 시조라고 할수 있다.

7. 1980, 그해 공청회는 뜨거웠다(대학민주주의 발화)

01.

1980년 4월 3일 전교생의 1/3이 체육관에 모였다. 학칙과 학생회칙의 개정시안 마련을 위한 공청회에 학생 900명이 모여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지금은 사라진 강당에서 모였다. 개정안을 심의 중 학생들이 학교 체제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족벌체제의 전횡이 만연한 이상 학칙과 학생회칙의 개정안을 마련하기에 앞서 학교체제의 개선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생들의 학교에 대한 불만이 터지기 시작한 봇물처럼 것 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왔다. 모순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구체적 접근이 이루어 졌다.

02.

* 무용과 교수들은 방학 중에 학교에서 최원장의 손자 손녀들을 위해 발레 렛슨을 해야 한다. * 2학년 남학생들이 운동장에서 상의를 입지 않은 채 축구를 했다고 기합을 받았다. * 성악과 학생들을 세종교회 성가대로 강제 동원했다. * 80년 3월 세종호텔에서 있었던 교수연수회에서 저녁식사 후 교수들에게 디스코를 강요했다. * 79년 특차전형 입학생들에게 4년간 장학금을 지원한다고 하였으나 지급하지 않았다. * 상대평가제를 실시한다며 무리하게 재학생 10%의 낙제 제적을 시도하고 있다.

* 최원장이 연극부의 작품선택과 의상, 소품까지 지정하고 의상을 학생돈으로 몇 번씩이나 교체하게 했다. * 다른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고 기독교의 특정 서클만 지원하고 있다. 축제 때에는 가톨릭학생회와 불교학생회가 활동하지 못하게 방해했다. 사월초파일에 불교학생회가 연등행사를 하는 것을 불허했다. * 주명건 기획처장이 학보사 자문위원장이라며 기지인원, 기사면 배정, 기사내용까지 일방적으로 결정했다. * 78년 세종대학으로 교명을 바꿀 때 학생들과 교수들, 동문들의 의견을 배제되었다. 심지어 지리과, 일어과의 폐과가 학과 교수들도 모르는 채 학교 측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결정되었다.

* 최원장이 이사들의 도장을 자신의 책상에 비치하고 이사회의 소집 없이 의사 결정한다. * 최원장은 부학장, 대학원장, 재단이사일뿐더러 학교의 6개 부속기관 중 2개(박물관장, 출판부장), 9개 부설연구소 중 3개(한국 전통음식연구소, 한국 의상연구소, 한국 관광산업연구소)의 책임자 직책을 독식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선명하게 족벌의 전횡구조를 설명한 것은 다음과 같은 표현이었다.

“ 아빠(주영하)는 학장 겸 재단이사,
  엄마(최옥자)는 대학원장 겸 부학장, 재단이사,
  큰아들(주명건)은 기획처장 겸 경영대학원장,
  큰딸(주경란)은 학과장,
  작은딸(주경은)도 교수
  장모(김  원)은 이사장“ 

그날 공청회는 대학민주주의가 발화되어 심지를 타고 들어갔다. 학생들도 예측 못한 30일 철야농성의 시발점이 되었다. 뜨겁게 청춘을 불사르듯 대학민주주의는 횃불이 되어 타오르기 시작했다.

03.

24추는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8개항의 요구안’을 마련하고 학교 측에 전달하기로 했다. 학생들은 학교 측이 ‘8개항의 요구안’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밝힐 때까지 체육관에서 농성을 하기로 했다. ‘8개항의 요구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재단과 학원의 분리, 재산 공개 (2) 교무위원 전원 사퇴(족벌체제 철폐 즉 학장을 위시한 족벌세력의 퇴진) (3) 학생처 개편, 책임자 징계 (4) 교수임용제 계약제 철폐 (5) 대학언론자유 보장 (6) 부와 권력에 편재한 교수 자진 사퇴 (7) 학장공관(애지헌) 학외이전, (8) 학생활동공간 활용“

공청회를 준비해 왔던 24추위원들이 사흘간의 철야로 지쳐 쉬고 있는 동안 공청회에 참석한 학생 중 몇몇이 농성진행을 맡아 분위기를 북돋았다. 학생대중 속에서 싸움의 지도부가 배출된 것이다. 이들은 한달간의 농성이 끝날 때까지 지치지 않고 싸움을 이끌었다.

04.

철야농성 중 학교 측(영선과장 손X, 총무과장 이상X 등)은 체육관의 전기를 차단시켰으나 학생들의 항의로 원상회복 시켰다. 오후 9시경 경찰이 진입할지 모른다는 정보가 있어서 학생들은 예비역을 중심으로 자위대를 조직하여 정문에 배치했다. 농성장인 체육관 출입문 앞에는 의자, 책상 등으로 바리케이트를 설치했다. 아침 최저기온이 영상 4~5도 정도로 마루바닥 위에서 밤을 세우기에는 추웠지만 3백여명의 학생들이 체육관에서 밤을 지새웠다.

건전가요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상록수’, ‘사노라면’, 요즈음의 재학생들은 잘 모르는 ‘흔들리지 않게’, ‘우리 승리하리라’, ‘이 세상 어딘가엔’ 등이 자주 부른 노래였다. 이들 몇 가지 가요만을 수십번씩 반복해 불러도 지루한줄 몰랐다. 그만큼 학생들의 결의는 확고부동했고 목표의식은 선명했다.

8. 1980, 드디어 평교수협의회 출범(제자들을 위해 일어선 교수님들)

01.

학생들이 학장실에서 농성을 계속하자 주채혁, 김찬삼 교수 등은 제자들과 대학민주주의를 위해 평교수 협의회를 결성한다. 평교수협의회는 “학생들의 입장을 지지하며, 학교 측은 학생들의 정당한 요구를 수용하라”는 내용을 담은 “평교수협의회 결성 1차결의문”을 발표했다. 학생들이 애지헌과 학장실에 들어가 농성을 하자 교수들의 분위기는 한마디로 “잘 터졌다. 속이 시원하다”는 표현을 할 정도였다. 이러한 분위기 아래서 진취적인 교수들은 ‘평교수협의회’를 결성했고 학생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성명서까지 발표하게 된 것이다. 김찬삼, 주채혁, 김진섭, 문용린, 장영태 교수 등이 주축을 이루었다.

조선일보 4월 6일(일)자 신문에 ‘학장연금’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조선일보는 수년간에 걸쳐 악의에 찬 허위보도를 일삼았다. 특히 세종대 보도에 있어서는 그저의가 돋보일 정도 였다. 학생들이 학장실에서 면담과 답변을 요구하였는데 학장일행이 빠져나갔는데 학생들을 연금했다고 학생들에게 덮어씌우기를 하고 있었다.

02.

평교수들은 4월 7일(월) 평교수협의회 2차 결의문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① 학장퇴진은 일정기간 유보 ② 최옥자 대학원장은 모든 공직 사퇴 ③ 주명건, 주경은 교수는 보직을 갖지 않은 평교수로 남는다”는 타협안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교수들은 “최원장이 족벌체제의 가장 큰 문제이다. 나머지 요구사항은 인사위를 공식화하고 교수회의를 활성화하면 실현될 수 있다”며 학생들이 평교수안에 동의 해 줄 것을 설득했다. 그리고 평교수협의회 대의원 12명과 학생대표(24추위원)들로 ‘세종대학 평교수 학생협의회’를 구성했다. 평교수 학생 협의회는 대화를 통해 사태를 수습하기로 합의했다.

24추 박위원장은 수면부족과 피로로 한때 실신했다.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깨어났는데 학생과 교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죽어도 학교에서 죽겠다’며 학교로 되돌아 왔다.

학생대표들은 교수들에게 ‘8개항에 요구안’을 관철시켜야만 하는 이유를 학생들의 설문조사를 통해 모아진 구체적 불만과 비리사항을 사례로 들어가며 설명하고 적극적인 지지를 요구했다. 이날 학교 측은 학생들이 농성장인 애지헌과 학장실의 수도와 전화(심지어 교내의 공중전화까지)를 끊었다. 이에 대해 학교 측에 항의하여 수도는 다음날 복구시켰다.

03.

4월 8일(화) 오후 4시경 김찬삼 교수 등 평교수대표 4인은 4월 6일에 마련한 “평교수협의회 2차결의문”을 주학장과 최원장에게 전달했다. 오후 8시 30분경 평교수대표들이 돌아와 새날관 3층에서 평교수들에게 경과를 보고했다. 오후 9시 20분경 주씨최씨 일족들이 흥분된 상태로 학교에 나타났다. ‘교수들이 감히 최원장의 목을 자르려 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최옥자 대학원장, 주명건 기획처장, 주경란, 주경은, 그 외의 친족과 측근들이 자동차 3대에 나누어 타고 학교에 들어왔다.

최옥자 대학원장, 주명건 기획처장, 주경란 교육학과장 등이 평교수들에게 평교수협의회를 해체할 것을 종용하며 폭언을 퍼부었다.
(최원장이 교수들에게) 음, 여기와 앉아! 너희들이 정말 그럴 수가 있는냐? 나를 따를 사람은 이방에서 나가고[즉 회의를 중단하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려면 너희들은 총사퇴하고 물러나라[즉 교수직을 사직하라]. 학장님을 중심으로 우리는 똘똘 뭉쳐야 한다. 평교수협의회를 해체하고 교무위원회에서 결정하는 사항을 전적으로 따라라. 돈이냐, 교수사직이냐?
(측근 교수들이 평교수들에게) 최원장 사퇴에 대한 의견을 공개 찬반거수로 표명하라.
(측근 교수들이 기자에게) 기자십니까? 감사합니다! 평교수협의회는 학장님과 대학원장님이 학장실에 감금되어 있을 때 구출하기 위해 조직된 것입니다. 이제 평교수협의회는 우리들이 돌아왔으니까 해체되고, 주영하 학장님을 선두로 우리는 똘똘 뭉칠 것입니다. 앞으로는 모든 것이 잘되어 갈 것입니다. 이렇게 기사를 써주십시오. 수고하십니다. 이상은 이 자리에 참석하였던 기자들의 기록을 옮긴 것이다.

교수들이 충돌을 피하기 위해 침묵을 결의하자 최원장은 처음의 고자세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저자세로 교수들을 설득 회유했다. 그러나 이들은 교수들을 회유하는데 실패하고 새벽 5시경 돌아갔다.

04.

4월 9일(수) 전날 밤부터 새벽에 걸친 최원장 일행의 ‘소행’에 분개한 교수들은 오후 1시경 “평교수 3차결의문”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평교수협의회 1,2차 결의문의 내용을 재확인한다. 특히 최원장의 학내의 모든 공직사퇴를 권고한다. 학생들의 불만사항에 대해 시정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학교당국의 조속한 해결책을 촉구한다. 평교수협의회의 약화 해체 기도를 중지하라.” 오후 2시 30분경 평교수 대표 4인이 기자회견을 열고 “평교수 3차결의문”이 나오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그리고 교수들은 이날부터 농성에 들어갔다. 50여명의 교수들이 순번을 정해 교대로 새날관 3층에서 철야농성을 시작했다. 이로써 교수와 학생들 간에는 비록 느슨한 것이었지만 ‘족벌퇴진 공동전선’이 형성되었다.

학생들 역시 오후 5시경 “학생 2차결의문”을 발표했다. 그 내요은 다음과 같다. “ 4월 3일의 ‘8개항의 요구안’의 관철 고수 입장을 결의한다. 학교당국의 위협과 교권침해를 좌시하지 않겠다. 비폭력 대처를 결의한다.”

05.

전날 밤 주씨일가의 일행의 소행은 교수들의 결속력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학생들의 족벌완전퇴진 주장과는 달리 교수들은 족벌체제의 제일 큰 문제점이 최원장의 유아독존적인 태도에서 비롯됐다고 보고 최원장의 축출로 족벌철폐가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학생과교수들은 비록 당면목표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족벌철폐라는 기본적인 방향에는 인식을 갖이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 벌어진 최원장 일행의 소행은 일부 소극적인 교수들에게 조차도 그들의 자존심을 일깨웠다. 교수의 권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교수와 학생들 사이에는 공동운명체적인 의식이 강하게 형성되었다.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로 볼 때 교수들의 농성은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파격적인 것이었다.

9. 1980, 대학비리 폭로와 투쟁의 장기전

01.

투쟁은 장기적인 대치국면에 접어들었다. 학교 측과의 협상도 진전이 없었다. 직접적인 대화도 이루어지지 않고 간단한 전화통화가 몇 차례 있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해 나가려 한 것이 폭로전, 청원서 발송, 법적고발 등이다.

한차례 화양리 일대에서 시민들에게 유인물을 나누어 준 가두폭로전이 있었으나 기자회견을 통한 폭로전에 주로 의존했다. 농성프로그램도 단조로워 농성 초기의 열기를 유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것은 농성이 사전 준비 없이 대중적 열기에 의해 전개되었기 때문이었다. 지도부인 24추는 농성이후의 장기전에 대한 전망을 세우기 어려웠다. 처음 집회와 시위를 진행하는 2학년이 추축이 된 24추위원들에게 벅찬 과제였다. 그들은 대부분은 겨우 20살 남짓이었다. 두렵기도 하고 엄청난 압박과 탄압의 두려움속에 대학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청춘의 고민이 많았으니라.

학생들은 더 이상 대화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학교측은 시국의 추이를 살펴가며 지연책을 쓰고 있다. 장기전이므로 일반시민들의 여론을 환기시키고 정부에 조속히 주씨일족을 처벌할 것을 요구하자고 결론을 내린 뒤 족벌부조리를 폭로하기로 했다. 24추는 사전에 이러한 비리를 알고 있었지만 공개적으로 폭로하는 것을 망설였다. 이러한 폭로를 통해서 족벌세력들은 도덕적으로 치명타를 입고 결국은 물러서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대학의 명예가 훼손되는 것을 매우 우려했던 것이다.

02.

학교측은 언론사를 동원하여 일부 불순한 학생들과 교수들이 선동에 의해 사태가 촉발되었다는 식으로 언론보도가 됐다. 이에 학생들과 교수들은 분노했다. 맞대응이 필요했다. 폭로전에서 교수, 직원, 동문들의 협조와 협력은 절대적이었다. 평소 잘 못된 것을 알아도 말 못하고 참아 왔던 비리와 모순들이 봇물터지 듯 쏟아져 나왔다. 폭로전을 통해서 봉건적이고 비민주적인 족벌체제는 더욱 추악한 모습을 온세상에 드러냈다.

족벌 측근들은 자격도 없이 보직을 맡고 강의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산하학교의 부정편입 및 학칙위반에 관련된 비위사실 전모를 폭로했다. 대양학원이 비리재단의 대명사가 된 것은 이 비리폭로 때문이었다.

비리재단의 대학비리는 사생아로 반드시 나올수 밖에 없다. 그것도 동토의 왕국처럼 하나의 왕국을 하나의 제국으로 만들어 대학을 공공재가 아닌 1인이 경영하는 기업처럼 사기업화 시켰다.

03.

학생들이 교수, 직원, 동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폭로전은 시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싸움은 정보전이기도 한다. 더 구체적이고 확증적인 정보를 파악하고 폭로 함으로써 싸움의 명분과 신뢰성을 높여 나갔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폭로전을 통해서 비리체제의 철폐는 학생, 교수, 직원, 학부모 그리고 동문이라는 총체적인 대응으로만 가능하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두고 두고 세종대 민주화 투쟁에 있어 가장 힘들고 가장 어려운 전략적 과제였다.

학생들이 가장 선봉에 섰고, 교수님과 직원, 그리고 일부 동문들이 결합을 했지만 역사적 환경에 따라 싸움은 항상 승리하진 못 했다. 크고 작은 승리가 있었지만 패배 또한 대패를 당하고 실패한 경험도 있다. 세종대의 싸움은 항상 역동적인 정세와 맞물려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기는 듯 보이다가도 학교측의 인맥과 네트워크에 의한 보수정권의 탄압으로 물거품으로 돌아간 적도 많았다. 그러나 새로운 민주주의는 저절로 자라는 나무가 아니듯 아픔과 고통을 아로새기며 시퍼렇게 날이 서가며 성장해 갔다. 패배할 때에는 학생들은 제적 등 징계를 당하고 교수님과 직원들은 해고 등의 엄청난 탄압을 받아 왔다.

04.

각자의 진지를 오랫동안 구축할 때도 있었고, 잠시 아무것도 없는 듯 고요할 적도 있었다. 그러나 시대의 아픔과 대학의 고통이 정점에 이르러 시대변화가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다시 일어선다. 함께 하면 두려울 것이 없는데 혼자일 적도 많이 있었다. 나그네와 노예생활을 벗어던지고. 학원이 주인이 되어 비리재단과 싸우는 싸움을 학생들이 혼자 하는 경우도, 교수님들이 혼자하는 경우도, 직원들이 혼자하는 경우도 있었다.

외롭게 싸울때 힘에 겨워 포기하고 달려갈까 고민할 때 바람처럼 나타나는 도깨비 불처럼 세종대의 민주주의 역사는 그렇게 불처럼 바람처럼 후세대에 의해 쓰여진다. 역사를 기록한다면 실패의 역사와 두려움의 역사가 사라질 것이다. 자긍심과 비전이 있어 더욱 강해지는 더욱 자유롭고 행복해 지는 미래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그때 처럼 뜨거울 수 있다면, 지금도 그때처럼 재미있다면, 지금도 그때처럼 그들이 서로 연대 할 수 있다면, 지금도 그때처럼 싸울 수 있다면 대학의 주인은 우리라고, 성공이라고 할만하다.

10. 1980, 결의문으로 싸움의 논리를 주장하다

01.

장기적인 농성과 휴강조치에 걱정을 한 학부모들이 학교를 방문했다. 학생들과 교수들의 설명을 통해서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된 학부모들은 학교 측의 태도에 분노하여 “세종대 학부모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현 사태는 학교당국의 부조리의 누적에서 원인된 것이며 학교당국은 문제해결의 의지가 없다. 세종대학에 교수와 학생이 자유롭게 연구하고 배울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야 한다. 문교부의 해결책 제시를 요구한다.』 24추는 학부모에게는 학교방문을 요청하는 글을, 농성에 참여하지 않은 학우들에게는 현재의 실정을 알리고 참여를 당부하는 “학우에게 보내는 글”을 각 가정으로 발송했다. 또한 장기전에 대비하여 자취를 하고 있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생활할 것을 권장했다.

02.

평교수들이 “평교수 협의회 4차 결의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평교수협의회의 교수명단을 공개했다. 결의문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학교당국의 교육자적 양심에 입각한 결단을 촉구한다. 결의문 서명교수에 대한 개별 회유 책동을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 측근인사는 학교당국자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행위를 중지할 것을 촉구한다.』

평교수들은 4월 16일 “평교수 협의회 5차 결의문”을 발표했다. “주학장이 학원정상화를 위해 상징적인 지위에 머물고 모든 권한을 교수회의에 일이하겠다고 한 것을 명예학장이 되어 퇴진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환영한다. 최원장의 모든 공직 사퇴를 거듭 촉구한다. 학교당국이 제시한 이른바 재정위원회, 인사위원회, 학사개선위원회, 건설 및 시설위원회, 대학발전위원회의 설치 운운은 문제 핵심의 호도이다. 호텔등지에서의 변칙적인 각종회의를 중지하고, 교무행정을 정상화하며 장기적인 휴강조치를 해제할 것을 촉구한다.”

03.

학생들은 문교부장관에게 청원서를 발송했다. 농성만으로는 문제 해결에 대한 전망이 보이지 않자 정부 측의 개입을 기대했다. 구체적인 비리가 드러난 이상 정부가 개입할 것이고 정부가 개입한다면 어떠한 형식이던 족벌세력은 퇴진시킬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청원서는 문교부와 청와대 두 곳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는데 순서상 문교부에 먼저 보냈다.

4월 15일(화)에 학생들이 3차 결의문을 발표했다. 『족벌 전원과 재단이사는 총사퇴하라. 장기화 지연술에 의한 농성와해기도를 즉각 중지하라. 문교부의 비리조사와 중재를 촉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와함께 새로운 비리도 폭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X은(둘째딸), 신X주(경상학부장), 박XX(교무처장) 특히 박XX 교무처장은 석사학위조차 없는 상태였다. 1980년 세종대학교에 대학원 박사과정에 시험도 보지 않고 입학하여 재학 중이다.

학생들은 대통령에게 4월 17일(수) 청원서를 발송했다. 학생들이 밝혀낸 구체적인 비리 사실들에 대해 학교 측이 ‘법적하자가 없다’고 주장하자 “학생 4차 결의문”을 통해 법적투쟁을 불사할 것을 다짐하는 결의를 발표했다. 『교권을 수호하고 민주학원을 이룩하려는 최종목표가 불변함을 재천명한다. 주학장, 최원장의 교육자적 양심에 호소하였으나 법적하자가 없다고 주장하며 비열한 술책을 자행하므로 법적투쟁을 불사할 것을 다짐한다. 사태의 수습을 위한 문교부의 노력을 촉구한다. 』

결국 문교부는 세종대학교에 ‘최원장이 이사직과 대학원장직을 겸직한 것이 사립학교법의 겸직 금지 조항에 위배된다’는 것을 시정통지하여 최원장이 이사직을 사퇴하며 승리에 이르게 된다.

2016학년도 총학생회

2016학년도 총학생회의 이름은 '지음' 이다. 지음 총학생회의 총학생회는 윤성현이다. 임기 막바지인 11월 들어 다양한 구설수에 휘말리고 있다.

소프트웨어 융합대학 부정선거 논란

돕바 공동구매 납기지연 논란

봉사활동 시간 무단 지급 논란

현재 세종대학교 대나무숲, 각 제보처 등을 통해 속속 제보가 들어오고 있다. 관련자는 학생회관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도 게시된 상태다. 자세한 내용 추가 바람.

2015학년도 총학생회

2015학년도 총학생회의 이름은 '티온' 이다.

  • 2015년 2월 7일, 등록금 인하 요구 현수막 게시

2014학년도 총학생회

2014학년도의 총학 이름은 '액션' 이었다.

액션 총학생회의 총학생회장은 김종현이다.

총학생회 소식지, 세종니야기

총학이 소통을 하고자 만드는 소실지로 세종니야기가 있다. 지금도 발행이 되는 듯 하나, 액션 때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이즈는 엄청 크고, 빳빳한 종이에 올컬러로 만든다. 그런데 비해 내용 구성이 부실하고 배치가 보기좋게 되어있지 않아 빈 공간으로 인한 비효율성, 굳이 올컬러에 고급 종이로 만들어서 돈을 더 들이면서까지 이렇게 만들 필요가 있나 하는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가 들린다. 하지만 총학이 학우들과의 소통을 위해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높이 살 수 있다.

총학생회를 제외하고 모두 필요없다?

2014년 4월 10일 열린 전체총회에서 총장 직속 기구를 비꼬는 이야기를 해 논란이 일고 있다.

 우리 대학에 총장직속기구는 신문방송국, 세종나눔봉사단, 지음오케스트라, 누리아리이며
 학칙 어디에도 총장직속기구 운영에 관한 언급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어떠한 설립근거도 없는 유령단체인 것입니다.

이는 잘못된 이야기이며, 총학생회에서는 총장직속기구에 신문방송국, 세종나눔봉사단, 지음오케스트라, 누리아리를 들었지만 이 중 진짜 총장직속기구는 세종나눔봉사단 단 하나뿐이다. 전체총회에 참여하는 학우들의 대부분이 신입생인데, 새내기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알려줘야 하는 총학생회에서 이러한 발언을 했다는 점에서 이는 논란이 되고 있다.

또한 신문방송국을 비롯해 다른 기관도 정당한 방법으로 설립되었으며, 총학생회와 같은 명목 하에 봉사장학금을 받고 있기 때문에 특혜 아닌 특혜를 받고 있다는 말도 올바르지 않은 말이다.

학교기관/총학생회.txt · 최종 편집: 2021/05/21 16:43 (바깥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