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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규 문제

학원자주화투쟁

1980년 이른바 민주화의 봄이 왔을 때 세종대학생과 교수들이 맨 먼저 터뜨린 불만은 ‘족벌체제의 전횡’이었다. 1978년 교수로 부임한 설립자 주영하(朱永夏) • 최옥자(崔玉子) 부부의 장남 주명건씨(당시 31살)가 학교운영에 개입하는 등 학원을 파행적인 족벌체제로 운영해왔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 반발은 5 • 17과 함께 사라졌고 학원자주화투쟁에 다시 불을 붙인 것은 1987년의 6월 항쟁이었다. 1987년 6월 10일 시위 중 경찰에 연행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작된 학원자주화투쟁은 1987년 9월 18일까지 100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당시 학교당국과 학생들은 농성을 해제하기 전에 학생 요구사항 63개항에 합의, 양쪽 대표 정병선 학장1)과 황병렬 총학생회장 이름으로 합의사항을 법률사무소에서 공증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뒤로 1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도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종합대학으로 승격한 뒤 1988년 2학기 들어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확인작업을 폈으나 공증까지 마친 합의사항은 거의 이행되지 않았으며 학생들은 그 원인이 재단의 ‘하수인에 불과한 임명총장체제’에 있다고 결론지었다. 1988년 9월 8일 이른바 학원자주화투쟁에 관한 설문조사를 시작으로 학내의견을 수렴한 결과, 학생들은 ‘원흥균(元興均)총장 퇴진 • 민주적 총장선출방식 채택 • 족벌타도’라는 마스터플랜을 짰다. 1988년 10월 10일 비학생총회를 소집하여 “어용 • 무능총장 퇴진으로 학원자주화 앞당길 것”을 결의한 학생들은 그날로 총장실을 점거하여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농성은 43일 동안 계속되었다. 한편 학생들의 투쟁에 힘입은 교수들도 교수협의회를 결성, 학생들쪽에 가세했으며 직원들도 직원노조를 만들어 제 목소리를 내는 등 전반적으로 학내 분위기가 재단을 비난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자 대세에 밀린 주영하 재단이사장은 전체교수회의에서 직선총장제를 약속했으며 주명건교수(당시 경영대학원장)도 모든 보직에서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학교당국과 학생측은 ‘정상화 방안’ 16개항에 합의했는데, 그 중에서 핵심적인 것은 총장선출 여론수렴위와 총장직선제였다. 교수 5인 이상의 추천을 받은 총장후보 중 학생과 노조대표 5인씩으로 구성된 여론수렴위원회에서 동의를 얻은 후보 중 한명을 전체교수회의에서 직선으로 선출하고 재단은 이를 승인하기로 한 이 제도는 “학생이 교수를 심사한다”는 비난과 함께 “대학의 각 구성원들이 학사운영에 동등하게 참여하는 모범적 선례”라는 찬사를 받는 등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실제로 원흥균총장이 물러난 뒤, 여론수렴위의 동의를 얻은 이중출(李鍾出) 교수협의회장이 1988년 11월 30일 전체교수회의에서 총장으로 선출됨으로써 이른바 ‘세종대식 총장 선출방법’이 타대학의 ‘연구사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방식이 타대학으로 번질 것을 우려한 문교부2)가 총장승인을 요청한 지 두달이 넘은 1989년 2월 15일에서야 거부방침을 밝혔다. 결국 선출된지 8개월이 넘도록 문교부의 총장승인을 받지 못한 이총장(직무대리)과 보직교수 전원이 재정압박과 교직원 임금체불3) 등을 사유로 1989년 8월에 사표를 제출하는 사건이 생겼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8월부터 세종대 조선대 등 5개 대학 감사에 들어간 문교부가 감사결과를 통보하면서 “정관에 없는 대학발전위 등 자치기구를 해체하고 총장직무대리 등 보직교수를 해임하라”고 처분 명령을 지시했다. 이총장의 사표수리를 한달 동안 보류한 채 눈치만 살피던 재단은 1989년 9월 16일 문교부 지시대로 사표를 수리하고 사흘만인 1989년 9월 19일 박홍구(朴洪球)교수를 총장으로 임명, 그날 전격적으로 문교부 승인을 받아냈다.

교수들은 1989년 9월 20일 전체교수회의를 소집, 재단이 일방적으로 임명한 박총장을 인정할 수 없다고 결의한 데 이어 1989년 10월 6일 오영숙(吳英淑)교수(영문과 • 교수협의회장)를 총장으로 선출하여 이른바 ‘한 대학 두 총장’체제가 시작되었다. 학생들이 1989년 11월 7일부터 박총장 해임과 오총장 임명을 요구하면서 총장실과 본관을 점거, 학사업무가 마비되고, 신입생 원서접수를 조직적으로 방해할 움직임을 보이자 학교당국은 1989년 11월 24일 임시 휴업조처를 내렸다. 합의사항에 대한 일방적 파기가 발단이 된 세종대 사태는 여러 기이한 장면을 연출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을 더 이상 후배들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재학생들이 입학원서 접수를 방해하는 진풍경이 벌어지는가 하면 총장 취임식에서부터 최근 사퇴할 때까지 학생들의 거부로 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채 재단 수익사업체인 세종호텔에서 결재도장을 찍어야 했던 박총장은 ‘호텔총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됐다. 학교측은 1990년 4월 14일 단과대 학생회장 등 학생 51명을 기물파손 및 업무방해 혐의로 무더기 고발한 데 이어 1990년 4월 15일 공권력 투입 요청4)과 함께 “학사일정 마비와 학생들의 극한행동 우려”를 명분으로 무기한 임시휴업이라는 극약처방을 내놓았다. 또 학교측은 1990년 4월 25일 세종호텔에서 열린 징계위에서 직선총장 오영숙교수 해임을 결정하는 등 강경일변도로 나갔다. 그러나 그럴수록 학생들의 대응방법도 강경해져 거의 날마다 집회와 시위가 계속되자 1990년 6월 2일 새벽 4시, 건물옥상에 소방호스와 최루가스를 난사하면서 세종대 군자관 유리창을 깨고 경찰 11개중대 1천3백여명이 난입해 학원자주화투쟁중이던 학생들을 강제 연행5)했다. 학원을 ‘평정’한 뒤로도 전경 3개 중대가 교내를 지키는 가운데 비로소 학교에 들어온 박총장은 1990년 6월 8일 홍성수군 등 4명을 제적하고 이수형 자연과학대 학생회장 등 9명을 무기정학시키는 등 학생 20여명을 징계했다.

1990년 6월 2일 오후 2시, 세종대ㆍ한양대ㆍ건국대 등 서총련 동부지구소속 대학생 1천여명은 한양대 교내에 모여 세종대 공권력투입에 항의하는 규탄대회를 갖고 오후 3시부터 한양대 교문밖으로 진출하였으며, 이를 저지하는 경찰에 맞서 화염병 3백여개와 돌 등을 던지며 1시간 30분동안 격렬한 가두시위를 벌이다 자진해산했다. 학생들은 집회에서 '세종대 학원자주화투쟁을 공권력을 앞세워 분쇄한 것은 명백한 학원탄압이므로 세종대 학원자주화 쟁취 그날까지 연대투쟁을 강화하겠다'고 밝히고 연행학생 즉각석방, 재단비리 비호하는 민자당해체 등을 주장했다. (출처: 중앙일보)

그리고 학교측은 1990년 6월 20일 세종호텔에서 대화분위기 조성책의 일환으로 사표를 제출한 박홍구총장 후임에 이중화교수를 선출했다. 1990년 6월 25일 공권력이 철수하면서 학교측은 휴업 70여일만에 수업정상화를 발표했다. 그러나 정상화될 분위기가 조성되었기에 내린 조처는 아니었다. 예상대로 건국대에서 농성을 하다가 1990년 6월 25일 학교에 돌아온 학생들은 다시 ‘2대 불법총장’부터 쫓아내고 쇠파이프와 화염병으로 재무장했다. 다시 상황은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학교측은 학생들의 수업참여에 안간힘을 썼지만 학생들은 불법총장 퇴진과 민주총장 인정, 총장직선제의 학칙명시와 정관 삽입, 대학발전위원회의 인정과 학칙 및 정관 명시 등을 골자로 한 15개 요구조건을 내걸고 날마다 집회를 개최하였다.

정원식(鄭元埴) 당시 문교부장관은 1990년 6월 29일 기자회견에서 “학교측의 수업기간 2주 단축신청을 승인하되 만약 수업단축 최대기한인 1990년 7월 10일까지 수업정상화가 되지 않으면 전원유급시키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수차례의 공권력 투입과 징계조처 등 잦은 극한처방으로 오히려 적개심과 내성만 길러온 학생들은 문교부의 ‘전원유급’이라는 최후통첩에도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전국대학생협회는 “세종대 사태는 백만학도의 대리전”이라고 규정하여 전대협과 문교부간의 전면전으로 확대될 소지마저 보였다. (출처: 시사저널)

1990년 7월 10일, 문교부가 밝힌 전원유급 시한이 끝났으나 수업은 끝내 정상화되지 않았다. 이처럼 세종대 사태가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키자 1990년 7월 16일 문교부는 새로운 세종대 이사진을 통해 사태를 해결하려 했지만, 새 이사진 또한 농성중인 학생 4천6백여명 중 4천명이 넘는 학생들의 대량 유급조치를 확정하고 유급대상자 명단을 발표해 사태를 더욱 확산시켰다. 1990년 9월 26일, 결국 세종대 총학생회는 전체 총학생회를 열어 167일간의 투쟁을 철회했다. (출처: 한국대학신문)

관련 자료 영상이 세종대 역대총학생회장단모임과 총동문회 그리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추진위원회의 주도로 제작되었으며, 세종대 학원자주화투쟁과 관련된 사진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에서 자세한 사진자료도 확인할 수 있다.

장산곶매 탑 학교측 일방적 철거

1989~90년 세종대 학생들은 공권력 투입에도 불구하고 재단비리를 파해쳐 재단을 실무에서 몰아냈다. 그 성과를 기념하고자 2년간 모금으로 세운 것이 바로 장산곶매 탑. 그런데 1997년 2월 18일(화)~20일(목) 신입생 OT 기간에 총무과 직원들이 학생들이 없는 틈을 타 새벽에 탑을 철거했다. 이에 1997년 2월 20일(목) 총학생회는 총장실로 곧장 찾아가 항의했다. 학생들이 학교측에 담당직원의 공개사과와 탑의 원상복구를 요구했으나 총장은 단순히 “미안하다”정도의 반응을 보였다. 총학생회는 이에 반발하여 학교측과 지속적인 선전전을 벌였다고 한다. (출처)

주명건 이사장 축출

1984년부터 시작된 세종대학교 설립자 주영하 박사와 그의 아들인 주명건 대양학원 이사장과의 경영권 갈등이 고조되어, 2003년 12월 주영하 설립자가 주명건 이사장을 횡령 혐의로 고발했다. 2004년 6월 서울동부지방검찰청은 주명건 이사장을 이중계약서와 장부조작 등을 통한 횡령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였다. 이후 2004년 10월 18일 교육부는 1990년 세종대학교 재학생 대량 유급사태 이후 14년만에 종합감사를 시행하였다.

이와 관련해서, 교육부는 2005년 2월 11일,

  • 학교법인 대양학원에서는 세종호텔을 운영하고 있는 세종투자개발(주)에 100% 출자한 형태로 수익사업을 함에 있어, 세종투자개발(주)의 배당가능 이익금이 매년 발생하고 있는데도 학교법인으로의 배당실적은 전혀 없는 등 법인의 수익금 증대를 위한 직무를 태만히 한 반면, 법인 이사장·설립자 등은 세종투자개발(주) 및 출자회사의 회장 등으로 근무하면서 37억9800만원의 보수를 지급받았다. 배당가능 이익잉여금은 1998년 8억여원, 2003년 35억여원 등 지난 6년 동안 108억 2500만원에 이른다.
  • 학교법인의 기본재산인 토지를 처분하면서 처분 허가조건을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법인과 대학에 50억7300만원의 손실을 끼쳤다.
  • 교육용 재산을 매입함에 있어서도 토지의 교육 환경 적합 여부, 활용계획 등을 사전 검토 없이 매입함으로써 대부분의 토지를 교육용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방치하고 있으며, 예산 확보 없이 제3자에게 매입하도록 요청하여 자금 차용에 따른 이자 지출로 6900만원의 재정상 손실을 초래하였다.

다음과 같은 이유로 주명건 이사장을 축출했다. 그러나 교육부의 부실한 처방과 솜방망이 조치로 인해 전반적인 해결에 있어서는 미흡하다는 평이다.

2011년 주명건 이사가 명예 이사장직으로 복귀한 후에, 같은 해 4월에 설립자인 주영하 박사가 타계하여 애지헌 교회에 주영하 박사의 장례식을 치루었지만, 사실 여기는 돈을 받는 명목이였다. 실제 주영하 박사의 시신은 신촌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에 있었고, 당시 그 사실을 주영하 박사의 몇몇 친인척들만 겨우 알고 있었다. 주 전 이사장이 과거에 주영하 박사와 횡령 문제로 소송을 걸었었고, 그로 인해서 주 이사와 그의 친인척 관계가 상당히 좋지 않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후 이사장에는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임명되었는데, 그 역시 주 모 이사장과 등산을 통해 인연을 맺은 것으로 전해지면서 비난의 목소리가 크다.6) 게다가 유 이사장이 취임 후 평균 주 1회 가량 TV에 출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인 것과 달리 세종대 내 활동에서는 취임 이후 3개월 동안 재단 이사회에 두 번 참석한 것이 전부였고, 세종대신문의 인터뷰 요청에 별다른 답변을 주지 않았다. 세종대신문은 이사장 본연의 역할에 충실해달라고 비판했다.

2013년, 분규문제에 대해 'The School Of Joosus'라는 독립영화로 졸업생이 공개하기도 했다.

교표 락카칠 사건

이전 세종대 교표(한글 교표)는 주명건씨가 이사장 자리에서 물러난 다음에, 학내 구성원들의 투표로 결정되어 만들어진 교표다. 그러나 주명건 이사장 복귀 이후 예전의 교표(원형 라틴 교표)로 원상복구 되었다. 이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구 총학 및 해방세종 비상대책위원회 구성원인 신문방송학과 02학번 전 모씨가 2010년 10월 13일 새벽에 세종대 전교의 모든 건물과 도로, 동상 심지어 벤치까지 이전의 스퀘어 한글 교표를 빨간 락카로 도배해놓은 사건이 일어났다. 락카칠 후 전 모씨는 세종대학교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에 '학교의 방침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행위'라는 해명 글을 올렸으며 몇몇 사람들이 이를 변호했다. 그러나 이사장의 비리 자체보다는 오히려 학교에 시끄러운 일이 생기는 것을 더 불편하게 받아들이는 차가운 시선도 존재했다.

1)
당시는 단과대학이었음.
2)
문교부(文敎部)는 교육·과학·기술·예술·체육·기타 문화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대한민국의 중앙행정기관이었다. 1948년 7월 17일 정부 수립과 함께 발족하였으며 1990년 12월 26일 교육부로 개편되면서 폐지되었다.
3)
세종대는 당시 학교예산 고갈로 1989년 7월 25일에 교직원 280명의 7월분 봉급을 지급하지 못했다.
4)
이 요청으로 인해 1960년 6월 2일, 학내에 공권력이 투입되었다.
5)
1백16명이 연행되고 홍성수 총학생회장 등 5명이 구속됐다.
6)
외교부장관을 그만 둔 이유가 아주 유명한 분이다.
others/분규문제.txt · 최종 편집: 2021/05/21 16:43 (바깥 편집)